Yonhap News Agency profile of Pauline Park (5.11.11)
<사람들> 美입양 트랜스젠더 폴린 박씨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저의 태생적 정체성은 `진짜 한국입양인'(real Korean adoptee)’ 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 백인 가정에 입양된 폴린 박(51)씨는 11일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내가 `가짜 한국인'(fake Korean)이 아니라 외국에 입양돼 자란 한국인이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인들이 해외 입양인을 대할 때 한국인의 공통 정서를 지니고 있기를 기대하거나 생김새만 비슷한 이방인으로 취급하지만 두가지 시각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어릴 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외국인의 손에서 길러진 만큼 `토종’ 한국인과는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스스로 한국인의 범주에 속하고자 한다는 의미다.
박씨는 미국의 백인 가정에서 자라난 입양인이라는 태생적 정체성에 더해 성(性) 정체성을 놓고 이중으로 혼란을 겪어왔다.
그는 남성이면서도 스스로 여성의 삶을 택한 트랜스젠더로, 뉴욕 성소수자인권연합 의장을 맡아 트랜스젠더의 권익 신장에 앞장 서는 활동가다.
1960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씨는 생후 8개월 때 쌍둥이 형제와 함께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중산층 가정에 입양됐다.
양부모의 기억으로는 생부가 4.19혁명 때 숨졌고, 생모도 박씨 형제를 출산하고 사망했다. 그러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그는 “노르웨이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에게 입양됐기에 어린 시절 부모와 밖에 나가면 늘 우리 형제가 누군지 질문 세례를 받곤했다”며 “특히 60년, 70년대 밀워키는 철저한 백인사회라 초등학교에서 우리 형제가 유일한 유색인이었다”고 말했다.
양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자신이 태어난 한국에 대해 늘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한국에 관한 책을 찾기 위해 학교 도서관을 샅샅이 훑기도 했다.
박씨는 “매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었던 날이면 온 동네 백인 아이들로부터 모욕을 받아야 했다”며 “이 때문에 한국에 대해 상반된 감정을 느끼는 한편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도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고 떠올렸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독립한 그는 위스콘신-매디슨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런던경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보업계에서 일하던 박씨는 1998년 뉴욕으로 이주, 뉴욕 성소수자인권연합(NYAGRA)을 창립하면서 트랜스젠더임을 밝히고 대중 앞에 나섰다.
그가 `박’이라는 성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그는 “12살 때부터 남자에게 끌렸고 18살 때 커밍아웃했지만 완전하지는 못했다”며 “치열한 고민 끝에 사람을 여성과 남성, 양자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인위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트랜스젠더가 내 본연의 모습이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며 “NYAGRA는 뉴욕의 성적 소수자를 모든 차별로부터 보호하고자 만들었고 현재 650여명에게 메일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씨는 2002년 뉴욕시의회를 움직여 지방법에 트랜스젠더 차별금지 조항을 신설하는 성과를 거뒀으며, 기금 모금은 물론 수 백여건의 인터뷰와 기고, 다큐멘터리 출연 등을 통해 성소수자 권리보호에 앞장 서고 있다.
몇년 전 한국인 친구를 통해 혈육을 찾아봤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는 “가끔 한국 부모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1960년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게 없어 찾을 수 없다”며 “혹시 혈육을 찾는다 해도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트랜스젠더 활동가인 나를 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인생 목표”라며 “아직은 한 번도 기회가 없었지만 언젠가는 한국을 꼭 방문하고 싶어 한국어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